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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작성일
 
2019/08/04 19:57:06
 
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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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3) 편견과 장벽을 깨다(고넬료의 회심.....






사도행전 강해(13)
 편견과 장벽을 깨다(고넬료의 회심/10:1-11:18).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충청도 사람은 느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 보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경상도는 <죽었다 아임니꺼>, 전라도는 <죽어버렸어라>, 충청도는요 <갔슈>
 외모에 대한 편견도 많습니다.
 멋진 남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가 사귀면, <여자가 돈 많은가봐>라고 말합니다. 멋진 여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가 사귀면, <그 남자 능력있네>라고 말합니다. 멋진 남자와 멋진 여자가 사귀면, <정말 잘 어울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못한 남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가 사귀면, <재네들 정말 사랑하나봐> 라고 말합니다.
 이런 농담들은 현대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편견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민족들, 나라들 사이에 편견이 있습니다. 종교들 간에도 편견이 있고, 심지어 가족들 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지고 있는 편견들 중에 어떤 것은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작은 편견이지만, 어떤 것들은 정말 심각하게 왜곡되어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되면 삐뚤어진 선입견을 가질수 밖에 없어, 올바른 관계나 교제를 할 수 없게됩니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편견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로 자신들을 선택한 것을,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한다는 왜곡된 편애의 교리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방인을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무시했는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만드신 이유는 지옥에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탈무드에도 유대인이 매일 드리는 감사기도 중 하나는,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유대인이라면 이방인과 함께 교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오래 동안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교회의 복음 전파가 점차 꾸준히 넓혀져 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 다시 사마리아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지만, 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적인 것이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간간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처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본격적인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고 있는 장벽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의 문이 이방인을 향해 열리고, 이방인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고넬료입니다.
 핍박자와 대적자였던 사울이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 온 사건과 더불어, 오늘 고넬료가 구원받는 것은 교회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단일 사건을 기록한 내용 중에 가장 길고, 세 번이나 반복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 자신과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인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대전환의 계기가 됩니다.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단정 지어 왔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얼마든지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온다는 대 선언이 선포되어 집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행군에 새로운 빛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절을 보면, 그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의 가이사랴는 로마의 황제 이름을 딴 도시로써, 헤롯왕이 로마식으로 건설하여 로마의 황제 이름을 붙여 봉헌한 도시였습니다.
 유대 지방의 행정상의 수도였으며, 화려한 항구가 있던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도시였습니다. 베드로가 묶고 있는 욥바까지는 약 50km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는 로마의 총독과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 백부장이란 100명의 군인을 다스리는 장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백부장은 정복자의 군대의 장교로서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그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며,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회당에 출석하고 유대 율법과 관습을 존중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아 유대 공동체에는 포함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11:3의 말씀에서,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갔다>라는 비난을 받은 것을 보아, 고넬료는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넬료는 할례를 받고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나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경건한 삶과 의식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유대교를 믿기로 결정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종교적인 열심과 경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비록 경건하고 기도하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생활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진지함이나 선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허락하시는 의로움과 동일시 해서는 안 됩니다.
 
 인도의 힌두교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행하는 외적 열심들, 의식, 음식의 정결 문화, 채식주의 삶들, 얼마나 종교적으로 진지합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자기가 믿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로 인해 돌아가신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종교적인 신앙심이 깊어 보이지만 영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제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불러 간다면, 자신의 영혼이 어디에 있게 되는지도 모르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는 모르는 채,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3-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기도시간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시 고넬료는 순종하여 자신의 부하를 욥바로 보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다른 환상을 보여주시므로 서로 만날 준비를 시키십니다.
 
 이제 고넬료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둘의 만남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대인들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베드로의 이런 잘못된 편견을 깨트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 한 사람의 편견을 깨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편견을 깨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랴에서 온 고넬료의 사람들이 욥바의 베드로가 있는 집에 거의 다다렀을 때,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6시(지금의 12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을 때 마침 시장하였는데, 그때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1절에 보면, 하늘에서 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여러 동물들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부정한 동물도 있었습니다.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13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오래 동안 지켜온 유대인들의 전통을 깨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내가 결코 먹지 아니 하겠나이다”(14절)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주님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시고 이러십니까? 나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은 입에 댄 적도 없습니다. 그런 나에게 이것을 먹으라고요. 차라리 배고파 죽으면 죽었지, 나는 먹을 수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쾌하여 단호한 어투로 그 명령을 거부합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부정한 음식을 먹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인도에서도 간혹 선교사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줄 때 놀라는 것 중에 하나는, 샌드위치 안에 있는 달걀을 빼놓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기사들도 점심을 사주면 베지냐, 넌베지냐를 꼭 물어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서도, 얻어먹으면서도 종교적인 관습을 지키겠다는 그들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음식은 단순한 먹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17절)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메시지는 분명하였습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면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한 것을 사람이 더럽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룩과 부정에 대한 오랜 전통과 관습을 깨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베드로가 의아해할 때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령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루 밤을 함께 머문 후에 그들과 함께 갑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이 일에 대한 염려가 있었기에, 지혜롭게 유대인 형제들 몇 명을 데리고 함께 갑니다. 그리고 하루 길을 걸어 다음 날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동안 고넬료는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4절).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위법인 줄 알면서도(28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왔다고 고백합니다.
 33절을 보면, 고넬료는 어떻게 하여 베드로를 불렀는지와,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한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 왜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셨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경 말씀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임재하신 것입니다(44절).
 마치 오순절 날 자신들이 성령 침례를 받았을 때 생긴 일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놀라게 됩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한 성령을 받을 수 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즉각적으로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구들에게 침례를 줍니다(47-48).
 이것은 한 믿음으로, 한 성령을 받고, 한 침례를 행함으로, 그들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사울 사건은 그의 과거 경력이 어떠하든지, 그가 무엇을 하였든지, 누구나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고넬료 사건은 그의 민족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울 사건과 고넬료 사건은 단순한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이 구원받았다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중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고넬료의 구원 사건을 통해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편견으로 인해 막힌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11장을 읽어보면, 이 일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마자 비난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할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경험하고 돌아오는 베드로를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비난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3절입니다.“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지금 이들이 하고 있는 비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가 아닙니다. 왜 이방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느냐가 아닙니다.
 왜 자신들의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깨고 무할례자의 집에서 먹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난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 사람은 이러지>라고 비난하고 있을 때 우리도 이미 편견 가운데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들 가운데 함께 있게 하시고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하게 하심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편견을 깨어 우리의 그릇을 더 넓게 만드시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망치는 일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의심하는 사람도 옵니다. 호기심으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냥 와 앉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좌파도 오고 우파도 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영받아야 합니다. 다양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현 정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다름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우리의 전통, 문화, 생각들의 다양함은 서로가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오래 동안 지켜왔던 민족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집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복음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도록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어떤 물건에 가치를 둘 때 그 물건의 값이 얼마나 되는가를 계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꾼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가치를 지닌 존재일까요?
 하나님 아들과 바꿀 만큼 사랑받은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가치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이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좀 뭘 못해도, 실패해도, 하나님께 변함없이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정말 믿나요?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가 좀 없어도, 우리가 좀 핸디캡이 있어도 쪽팔리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가 누군지 안다면 좀 부족해도, 우리 자식들이 좀 남들보다 떨어져도, 인생에 실패을 경험해도, 좀 키가 작아도, 피부가 좀 까매도, 그게 왜 창피합니까?
 다이아몬드가 규빅들 사이에서 창피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소망이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사는 몇 년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영원한 회복이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잘 모르니까, 신뢰가 잘 안 되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찾아오는 구조대 같은 분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주님, 제가 알아서 할께요>라고 말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저는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모시고 택시를 렌트 해서 델리를 나갔다 온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제가 직접 운전할 때는 교통체증과 인도인들의 험한 운전 습관 때문에 힘이 들고 짜증이 날 때가 많이 있지만, 그날은 너무 편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자고 하면 기사가 길을 다 알고 있으니 제가 염려할 필요도 없어 편하게 다녀왔습니다.
 나보다 길을 더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길 때 갖는 편안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단순히 델리 나갔다 오는 것도 나보다 더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이리도 편하고 좋은데, 하물며 나의 인생의 길을 완전히 알고 아시고 나를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자신이 운전대를 붙잡고 고생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운전대를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내가 운전해봐야 힘들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 맡기고 인생의 키를 드리십시오.
 복음에 응답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 이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나의 인생을 맡기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의 편견과 장벽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더 큰 영원한 세상을 보게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알고 복음의 능력을 삶 가운데 경험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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