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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작성일
 
2019/07/21 19:38:06
 
조회수
16
글제목
 
사도행전 강해(11) - 사울의 회심(행9:1-9)






사도행전 강해(11)
 사울의 회심(행9:1-9)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였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제가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날이라고 고백합니다.
 제 인생 속에서 가장 잘한 일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라고 저는 늘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의 신앙의 경험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제 인생 속에서 가장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만큼 우리 인생에 중요하고 특별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인물의 회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핍박자였던 사울을 부르시고 구원하여,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한 사건을 소개한 것이 오늘 사도행전 9장의 내용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책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은 교회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사도행전에만 9장, 22장, 26장에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교회를 핍박하던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전도자가 되는 변화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다시 한번 이 사건을 사울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한 내용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 그는 누구였습니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거기 있었고(7:58), 그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8:1).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박해의 주동자였습니다(8:3).
 빌립보서 3:5에 보면, 사울은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특별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나온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으며, 종교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는데,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당시에 가장 엄한 율법의 교육을 받고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율법적으로도 흠이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2:3을 읽어보면 사울은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고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길리기아 다소에서 나서 자랐다는 말은, 당시 헬라 문화가 꽃을 피웠던 상업과 교육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 배웠다는 것은 당시의 가장 유명한 학자 밑에서 배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행 22:27-28)
 당시에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주고 시민권을 사든지, 로마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의 가정은 큰 부자였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로마에 큰 공을 세웠던 사람 같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사울은 혈통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학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을까요?
 빌립보서 3:6에 보면 그는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이제까지 유대교에서 보고 배워온 것에 대해 아주 열심히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배운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울은 예수라는 한 죄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새롭게 퍼지고 있는 예수 믿는 신앙이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깨트린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써 이런 거짓된 종교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나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없애 거짓된 신앙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울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사울 자신의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생각이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이것을 사울이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제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자, 예루살렘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2절입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뿌리째 뽑으려고 결심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시리아 다마스커스인,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가서 허락서를 받고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40km의 거리입니다.
 다메섹에 거의 도착할쯤, 그는 이전에 결코 그의 인생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한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3-4절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에게 비추는 경험과 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무 강렬한 빛이었기에 그는 말에서 떨어져 땅에 엎드려집니다.
 성경에서 강력한 빛과 큰 소리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분의 임재를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울은 지금 자신이 이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5절을 보면, 두려움 가운데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사울은 지금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에게 찾아온 이 신적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 누구십니까? 나를 찾아오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질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4:12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우리에게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은 무언가 열심히 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열정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계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며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 생명의 관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세상 그 어떤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셨습니까?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사울의 질문에 너무나 놀라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 소리를 들은 사울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가 살아있다니, 자신이 그토록 멸시한 예수가 하늘에 영광 가운데 살아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증오했던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이제까지 들었던 모든 예수님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그렇게 반박하고 반대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인생 전체를 뒤집어놓는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사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혈통적 축복과 많은 교육이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인 삶과 종교적인 열심과 사람들의 인정이 구원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한순간 없어질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악한 일을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왔기에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그는 이제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부르실 때 사울과 같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십니다.
 아마도 자신의 의와 고집과 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던 사울에게는, 이런 특별한 충격적인 방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배경을 볼 때 그는 예수 믿기 정말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 위해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때때로 이런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다급한 상황이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카작의 나타샤 자매 간증 - 예수 영화)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이런 특별한 경험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주실 때,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의 권유로, 때로는 직장 상사의 권유 때문에 교회에 왔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디모데처럼 부모의 영향이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누군가의 전도로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사울에게 있었던 사건만 놀라운 기적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전도해서, 직장 상사가 권유해서 믿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닌가요?
 주변 사람들이 권유로 교회 왔는데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집니까? 천국이 믿어지나요?
 예. 믿어집니다. 이렇게 믿어지는게 바로 기적입니다.
 내 믿음이 시원찮아 보여도 내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실 사울이 말에서 떨어진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다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특별한 축복을 경험했는데, 그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대전역에서 옆에 앉은 군인에게 예수님에 대해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하다 보니 군인이 어느덧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차 시간을 놓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쁨으로 다음 열차를 타려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아저씨가 자기에게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부산에서 왔는데 선원이었습니다. 이분이 복음을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기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가 아이들을 두고 바람을 피워 잡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 신문에 싼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죽이고 자기도 부산 내려가서 아이들과 함께 자살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결심하고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 그분을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선교사로 사역할 때 만난 카작인 한 분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는 큰 건설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부를 마음대로 사용하던 사람인데, 인생에 그리 행복감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자동차를 운전하던 기사가 있었는데, 늘 그 기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술도 안 먹고 여자에 관심도 없고, 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는 러시아 침례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탔는데, 자기 운전사가 읽고 있던 한 책을 보게 됩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날 운전기사로부터 그 책을 빌려 집에 와서 그 책을 밤새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변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관의 자리도 거부한 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도 카작의 자기 민족을 전도하기 위해 어려움 가운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를 만난 사람들은 인생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후에 위대한 전도자인 바울로 변했습니다. 저도 위대한 사람은 아니지만, 주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인생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바꿉니다. 살아야 이유와 목적을 바꿉니다. 복음은 직장에서 일하는 자세를 바꾸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이제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에 사울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 한가지가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없애려고 했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사울이 회심하는 놀라운 경험을 사울이 계획했습니까? 이것이 사울이 기대한 것이었습니까?
 사울이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회심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사울과의 만남을 주도하셨습니다.
 오늘 사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신 것은 주님의 전적인 계획이었고 주도였습니다.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소망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나에게 달려 있는 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먼저 찾아와 주신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 인생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성경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 순간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지금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고의적으로 그 소리를 외면하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찾아와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노크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그분을 여러분의 마음 밖에 머물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은, <지금 너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너의 목마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 너의 목마름은 바로 영적인 목마름이다. 나만이 채울 수 있다.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만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을 찾아와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고 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잊은 적이 없으십니다.
 습관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살아서 말씀하시는 생명 되신 하나님께 지금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신 분이, <목사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십시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2:3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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