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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작성일
 
2019/07/07 19:41:44
 
조회수
9
글제목
 
사도행전 강해(9) - 흩어지는 교회(행8:1-25)






사도행전 강해(9)
 흩어지는 교회(행8:1-25)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 모든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쫓겨났습니다. 교회들은 공산당의 핍박으로 인해 문을 닫기 시작하였으며, 목사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후에 문화혁명을 거치며 더 심한 핍박이 중국교회를 휩쓸었습니다.
 목회자들은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했고, 성경과 기독교 서적은 불법문서가 되어 모두 태워 없앴습니다.
 교회 건물들은 압수당해 파괴되었습니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중국에는 더 이상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는 이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다 사라졌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교회 건물과 조직은 사라졌지만, 신앙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에 중국이 개방되면서, 세계 많은 사람들이 놀란 것은 중국 안에 수십 배의 그리스도인이 더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핍박 가운데 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다른 축복은, 중국에서 추방된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나라로 갔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같은 주변 나라로 가서 사역을 하며 많은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오히려 핍박은 중국교회에 부흥을 가져오는 놀라운 축복이 되었고, 주변 국가로 복음이 확산 되는 축복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큰 박해로 시작된 일은 오히려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늘 보는 교회 부흥의 이야기입니다. 핍박은 교회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부흥케 하는 기회였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1장에서 7장까지의 내용이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의 출발과 성장을 보여준다면, 8장부터 우리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어 가는데 사용된 방법은, 핍박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다시금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외부적인 핍박을 통해 공격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수세적인 태도를 보였던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공격적인 방법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핍박은 아주 강력했고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박해로 인하여 떠나야 했고, 예루살렘교회는 사라지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항상 아는 것은, 고난은 교회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음 안에서 더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고난이 아니라, 외부적인 축복일 때가 많았습니다.
 편안하고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신자들이 여유로울 때, 교회는 약해질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핍박을 받을 때는 강해졌으나,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되었을 때부터 기독교는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되자, 교회는 핍박이 사라지고 오히려 국가의 보호 아래 있게 되면서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고난이 사라지자 능력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마 예루살렘 교회도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외부에서 칭찬도 듣고, 안정되면서 자신들의 교제에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성공했구나 하고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사역에 너무 바쁜 나머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교회에 핍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핍박은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1절 후반부를 보니 이 핍박으로 인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책임감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예루살렘은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며 사도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이 핍박은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스데반은 헬라 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기에 핍박은 주로 헬라파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히브리파 유대인 신자들은 당분간 더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3절은 지금 이 박해를 주도하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당연히 여겼던 사울은 이 핍박의 주도자가 됩니다.
 사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대인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3:5을 보면 그는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을 계속 잡아 마침내 교회라는 공동체를 없애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믿음이, 유대교의 신앙과 오랜 전통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유대인으로 아주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루살렘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 소문으로 듣던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이라고 믿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각 집에 들어가 아직도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이런 열심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 대해서는 9장에서 다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핍박 가운데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고난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정들었던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인 스데반을 잃으면서,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새로운 정착지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다시 떠나야 하는 아픔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까? 사실 이 순간을 위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들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구 소련이 무너졌을 때 선교사들이 구소련 전역과 중앙아시아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고려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탈린에 의해 원동에서 전 소련지역에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선교사들을 환영해 주었고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구소련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개척되는데 그들은 놀라운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한국을 떠나 인도에 왔습니다. 저도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3-4년이면 대부분의 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이동하십니다.
 우리 자녀들도 여기서 공부하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계획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흩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인도에 와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왜 우리가 머물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흩으실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때로는 쉽지 않지요. 때로는 지치지요.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이곳 인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십니다.
 그것을 찾으시고 이루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더 순종하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고난의 가장 큰 적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포기하려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새롭게 전진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 핍박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8에서 말씀하신 명령이 역설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도행전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오늘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온 가장 큰 어려움은 흩어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성도들 간의 이별이나 교회의 해산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4절을 보니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난이 현실적인 문제였다면, 흩어짐의 고난은 성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신자들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흩어질 때 함께 복음도 흩어진 것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도망을 가 숨거나, 침묵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에 대한 증거를,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했던 성령강림에 대해, 아름다운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가는 곳마다 전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복음 안에서 삶이 바뀐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복음이 더 이상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산헤드린 공회의 금지령과 폭력과 위협에도 멈추지 않고 복음 전도를 주도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 전도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자신의 구세주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는 목회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복음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술수는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더 멀리 확장되어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핍박을 통해 교회를 여러 지역으로 흩으시면서, 교회의 본래 사명인 전 세계적인 선교를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예루살렘을 지나 사마리아 땅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제 이렇게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축복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 사람을 오늘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이었습니다.
 스데반처럼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를 위해 선출한 일곱 일군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보니, 그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지방까지는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 갈등과 반목과 상처가 있었던 곳입니다.
 한 민족이었던 그들은 둘로 나뉘어 북은 이스라엘로, 남은 유다로, 오래 동안 싸우며 갈등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그들은 다른 민족과 결혼 관계를 통해 혼혈이 되었기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순수한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경멸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원래는 같은 민족이었지만, 서로 상종도 하지 않는 원수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불신 때문에, 서로를 향한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가면 편하고 시간도 단축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요단강을 건너 돌아갔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시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놀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것은 대단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마리아로 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시에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그곳의 영혼들을 사랑하였기에 찾아갔던 것입니다.
 빌립이 멸시받고 무시되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가는 첫 번째 순종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이 사마리아 지방에 전해지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8절에 보니 복음이 전해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오랜 시간 동안 가지고 있었던 갈등과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보기 싫은 상사도, 함께 하기 싫은 사람들도, 욕하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싫어하는 일본사람도, 무시하는 인도사람들에게도 복음은 다가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을 미워하고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빌립의 사마리아 지방에서의 전도 내용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을 보면, 사람들이 빌립의 말도 듣고 사람들이 빌립이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행하는 표적은 7절을 보면, 귀신을 쫓아낸 것과 병자들을 치유한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말은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였을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빌립이 행한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믿었다고 말하지 않고, 빌립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그들이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복음을 전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에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는 마술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9절)
 오래 동안 사람들은 시몬의 마술에 놀라 그를 따르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믿고 침례를 받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빌립을 따르는 것과, 빌립이 행하는 기적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시몬은 빌립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믿기로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침례도 받고 빌립을 따라 다닙니다.
 시몬은 빌립이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큰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자신도 빌립의 신적 능력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시몬은 기적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은 구원받은 신자일까요?
 성경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시몬이 예수를 믿고 침례 받은 것을 보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몬은 비록 침례까지 받았으나, 그의 마음과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믿음은 야고보서 2:19의 “네가 하나님이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한 지적 동의였을 것입니다.
 후에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의 능력을 살려고 한 태도나, 베드로가 시몬을 책망할 때의 모습을 보더라도, 그는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8-23).
 시몬은 진정한 신자라기보다는 겉으로만 신자인 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십니까?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곳에는 사탄도 그의 모조품을 만들어 냅니다.
 시몬은 돈을 주고 사서라도 빌립과 베드로가 하는 능력을 얻어서 사람들로부터 더 큰 칭찬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도록 하려고 합니다.
 시몬처럼 가짜가 되지 않으려면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확인하게 합니다.
 14-17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믿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빌립이 전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고, 사도들이 와서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임하셨을까요?
 일반적인 성경의 일관된 말씀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즉각적으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이 올 때까지 성령님이 보류된 것은 예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어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필요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이 늦게 주어진 이유는, 사마리아라는 특별한 지역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유대인들과 교제하지 않았고, 더욱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런 편견을 깰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환영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신자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성을 가진 사도들의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오래 동안 나누어져 있던 사마리아도 기독교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앞으로 있게 될 이방인 선교에 중요한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마리아 지방의 이 상황은 유대인 신자들의 공동체와, 사마리아 지방의 새로운 신자들의 공동체를 연결하기 위한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오랜 역사 속에 있어 왔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막혔던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이나 모든 신자들은 아무런 구별 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 성령님이 임재하심으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후에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장되면서 또 한 번 이런 예외적인 사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본 것처럼, 고난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시는 또 다른 방법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움이나 고통스러운 상황은 주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열고 계시는 또 다른 길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던져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내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불평하느라 세월을 허비하지 마시고 맡겨진 할 일을 하십시오.
 어떤 분은 인도에 사는 내내 짜증과 불평만 하다가 돌아갈 때쯤에 후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두신 이유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며 사명을 발견하십시오.
 
 또 한가지는 오늘 말씀에서 본 것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확장되어 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라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목사도 아니었으며 평신도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심한 박해가 시작되자 피해 도망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놀랍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처럼 순교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핍박을 피해 떠난 빌립 같은 사람들도 사용하십니다.
 너무 스데반만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박해의 자리에서는 떠났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계속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 사람들도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빌립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빌립과 같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마치면서 우리 교회도 빌립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계속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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