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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작성일
 
2019/07/01 12:37:24
 
조회수
15
글제목
 
사도행전 강해(8) 교회의 첫 순교자(6:8-7:60).






사도행전 강해(8)
  교회의 첫 순교자 - 스데반(6:8-7:60).
 
 
 루마니아 침례교회에 조셉 톤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생명을 내걸고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와 싸우신 분이셨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과거 루마니아의 공산정권과 독재자들에게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정부는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이분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차마 이 목사님을 죽이지 못하고 국외로 추방하였습니다.
 이분이 미국으로 오셔서 여러 신학교와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시간이 흘러 공산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던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 때에 미국 복음주의 잡지사의 한 기자가 조셉 톤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그 분은 <저는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당신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분은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운 것은, 동구권이 개방이 되어 나의 조국에 돌아갔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봐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제 마음에도 두려운 것은, 우리가 너무 편하고 좋은 환경에 살고 있기에, 주님을 위한 고난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릴까 두렵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느덧, 가진 것을 누리려고 하는 기득권자들의 신앙이 되어버린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도 번영신학과 성공지상주의와 안일함이 가득해진 것을 봅니다.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한 고난의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한국 교회 청년들가운데 더 이상 선교사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많은 전도사들이 대형교회를 들어가려고 줄을 서고 있습니다.
 모두가 고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이제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단어 같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본문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죽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였던 스데반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는지,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스데반 그는 누구입니까?
 8절, 10절, 7:55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우리가 지난 주에 본 것처럼, 스데반은 구제 사역을 책임지기 위해 선출된, 7명의 일군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스데반의 배경에 대해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는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몇 번이나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구제 사역을 책임지는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 증인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마28:19-20,행1:8).
 그래서 그는 계속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행6:8,10)
 
 어느 날 스데반은 한 회당에서 예수님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는데, 6장 9절의 말씀을 보면, 과거에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어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와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과 함께 변론하였으나, 그의 지혜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스데반은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여러 가지 구약성경의 증거로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사람들은, 이제 중상모략이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라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합니다(11절).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을 충동하여 공회에 잡아 재판을 받게 합니다(12절). 그들은 계속 거짓 증인으로 하여금 스데반을 고소하게 합니다.(13-14절).
 성경(6:15)은 거짓 증거에 대한 고소로 산헤드린 법정에 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거짓으로 고소하는 사람들 가운데 평안히 서있었습니다.
 
 오늘 이 법정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평안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스데반일 것입니다.
 스데반의 빛나는 얼굴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표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저의 얼굴 때문에 걱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하는데도 사람들이 문을 열면 바로 닫아버렸습니다. 너무 험상굳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참 은혜가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도 참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성령 충만하면 얼굴 표정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성경(고후3:3)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과 얼굴에서 무언가 다르고 매력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즐거워하고 편안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며 그들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두번째로, 스데반의 변론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재판했었던 대제사장이 <이 증언이 사실이냐?>(7:1)고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이 거짓 고소에 대한 스데반의 변론이 7장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이 내용을 스데반의 설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입니다. 그리고 사도직에 있지 않은 자가 했던 최초의 중요한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재판의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변론보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의 4번의 중요한 시대를 선택하여 설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족장시대, 요셉과 애굽에서의 시대, 모세와 출애굽의 광야 생활,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선지자들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네 시기를 연결하는 특징은, 그 시기 중 어느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제한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항상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항상 그들이 가는 길에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모두가 성전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그의 이름을 두시고, 거기에서 그의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성전을 소중히 여긴 것은, 성전이 가지고 있는 장엄함과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과 너무 동일시하게 생각한 나머지, 성전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전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으면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선지자들은 성전이 있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은 없다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편만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만든 성전 건물 안에만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의 건물에 제한되지 않은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죄악을 이야기 하면서, 이제 스데반은 자신의 변론의 결론을 내립니다.
 51-53절입니다.“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성전을 대신하고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음에도 백성들이 그를 거부했고 죽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자 그들은 회개하고 죄를 자복 하기는 커녕, 오히려 증오와 분노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54절을 보면, 백성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지만, 오히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와 권력을 가진 모임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데반을 잡아 죽일까하고 악의에 찬 눈동자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이런 비난과 조롱과 압력을 받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오늘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보이지 않는 침묵을 강요할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 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과 언어로 증거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부한다 해도 누군가는 귀 기울일 것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16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조그마한 압력 앞에서도 굴복하지는 않나요? 조용히 우리의 신앙을 감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굳이 내가 내 신앙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적당히 타협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베드로처럼 3000명, 5000명을 회개하여 믿게 하는 능력은 없어도, 한사람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왔던 안드레는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캠볼이라는 미국에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늘 다니던 골목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소년을 전도했는데, 그 소년은 후에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미국의 영적 부흥을 주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D.L, 무디입니다.
 무디의 전도 집회에서 메이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이어가 친구인 채프먼을 전도합니다. 채프먼은 야구 선수였던 빌리 선데이를 전도합니다.
 빌리 선데이는 어느 날 햄이라는 평신도 전도자를 초청하여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몇 사람 참석하지 않았을뿐더러, 결신자도 청소년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전 세계를 다니며 수억명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빌리 그래함은 못되어도, 중간에 이 믿음의 계보를 잇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우연히 판카즈라는 인도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예루살렘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번 주에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근데 이분은 브라만 출신이고,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분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신 분들은 한국 어느 교회에 외국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처음 이분을 만나 도와주고 주님을 알게 해주었을 때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분과 하루 교제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분을 통해 하실 일들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세번째로, 스데반의 죽음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증오와 분노로 스데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스데반은 사람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었습니다.
 56절입니다. 스데반은“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하고 외칩니다.
 성경은 항상 예수님의 승천 이후를 설명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그의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막14:62, 히1:38:1,12:2, 골3:1 등)
 히브리서 1:3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0:11-12도,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56절을 보면 주께서 서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보좌에 서 계신다고 표현한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서 계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순교하는 첫 번째 사람인 스데반을 천국에서 맞이하실 때, 그냥 앉아서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 순교한 스데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이 말은, 예수님을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관시킴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는 말이었기에, 스데반의 이 말을 듣던 유대인들은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당시에 성전과 율법을 연결하는 것은 제사였습니다.
 동물의 제물을 바침으로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성전제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구원은 율법에 나온 예식을 지킴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는 스데반의 증언을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스데반의 증언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귀를 막았다>는 것은 이 말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 옷을 벗기고 돌을 던져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가 스데반의 몸은 부서트릴 수 있었으나, 그의 영혼은 부서트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그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59-6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와 함께,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이 잠들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스데반이 다시 깨어날 때, 그는 그가 사랑했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었을까요?
 사람들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데반의 죽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죽음이었습니다.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날마다 죽음을 향해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냥 무의미하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갈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을 위해 돌에 맞고, 목이 잘린 채 죽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편안하게 죽는 것이 정말 불행한 죽음인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살았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한 청년에게 큰 충격과 도전을 줍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58절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 청년은 스데반의 변론을 들었으며, 스데반의 모습을 보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아마 이 청년은 스데반이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스데반의 죽음은 평생 이 청년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후에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하나님의 전도자가 되었을 때,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간증을 하였습니다.(행22:20).
 이 젊은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중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도 바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후에 기독교 역사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첫 번째 교회의 순교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은, 다른 중요한 것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전 세계적인 기독교 선교의 발전에서, 그가 이룬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죽음은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교자의 피에 의해 성장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핍박받고 생명을 드렸습니다.
 
 저는 처음 복음의 문이 열리는 선교지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대가를 치루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복음 때문에 생명을 드린 처음 사람들 때문에, 그 민족이, 그 나라가 축복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정에서도 처음 복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헌신과 인내 때문에 자녀들이, 다음 세대들이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 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도록 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오랜 시간 끝나지 않는 고난 가운데 가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길을 건설하는 중일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결과는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애굽을 멸망시키셔서 그곳에 유토피아를 세우지 않으시고, 그렇게 고생시키다가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광야 생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스데반,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그에게 돌아온 것은 거짓 모함과 고소였습니다.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천국과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이 땅에서 계속 천국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천국은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 오염되면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여기면 눌러앉고 싶어집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정말 우리 집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때, 이 땅에서 기적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와 기대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실패만 계속하다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라고 사람들이 평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평가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고난, 거부, 비난, 심지어 죽음조차도 일반적인 신자가 받아들여야 할 기준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성공이, 축복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은, 우리가 성공할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업이 실패하면.... 내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면... 내 건강이 나빠지면... 내가 직장에서 퇴직하게 되면...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생기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광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영광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시간을 통해 주님을 더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사람은 다 고통이 있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할 때든지 실패하여 어둠의 골짜기로 지나갈 때든지, 변함없이 주님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을 원하십니다.
 잘 나갈 때, 모든 것이 평안해 보일 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힘드시나요?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내일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신가요? 주님이 길을 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가십시오.
 이것이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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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9

297

 사도행전 강해(8) 교회의 첫 순교자(6:8-7:60).

김기태

2019/07/01

15

296

 사도행전 강해(7) - 교회사역의 우선순위(행6:1-7)

김기태

2019/06/23

17

295

 사도행전 강해(6) - 교회의 순결(행4:32-5:11)

김기태

2019/06/17

23

294

 사도행전 강해(5) -교회 핍박의 시작(행4:1-37)

김기태

2019/06/12

19

293

 사도행전 강해(4) - 교회가 주어야 할 것(행3:1-10)

김기태

2019/06/12

19

292

 사도행전 강해(3) - 첫 교회의 모습(행2:42-47)

김기태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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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강해(2) - 교회의 탄생(행2:1-42)

김기태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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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강해(1) - 교회 탄생의 준비(행1:1-14)

김기태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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