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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태
작성일
 
2019/06/12 11:55:12
 
조회수
45
글제목
 
사도행전 강해(5) -교회 핍박의 시작(행4:1-37)






사도행전 강해(5)
  교회 핍박의 시작(행4:1-37)
 
 
 제가 아는 한 젊은이는 선교사로 헌신하고 아내와 함께 선교지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젊음을 모두 바친 선교지에서 하루 아침에 추방을 당합니다. 그가 사랑했던 땅, 사람들, 교회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집사님은 중소기업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하였습니다. 저를 초청하여 월요일마다 직원예배를 드리고, 믿지 않는 직원들을 열심히 전도하려고 하였고, 많은 재정을 선교헌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IMF에 찾아왔을 때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회사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마침내 회사는 부도가 나 경제사범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있는데도 어려움이 생길까요?
 고난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우리 삶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삶의 현실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든지 아니든지에 관계없이 우리 인생 가운데 불쑥 찾아오는 손님과도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디모데후서 3:12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앙 때문에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내용은 계속되는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고 교회가 시작되면서 교회는 계속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편안하고 축복으로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제 교회가 고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루살렘 교회가 첫 번째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첫 번째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바라보았는지를 함께 보면서, 오늘 우리 삶과 교회를 향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를 보면서, 고난보다는 축복을 더 많이 강조하는 이 세대 가운데, 1C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아들이고, 이겨나갔는지를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첫 번째 경험하게 된 어려움은 바로 외부로부터 오는 물리적인 핍박이었습니다.
 1-3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성전 미문에 있었던 앉은뱅이 거지가 기적적으로 치유되면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몰려왔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로 약 5천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전 안에 있던 자들 가운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못 마땅히 여겨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소수였지만 정치적인 힘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오직 모세 오경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없기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들이 죽인 예수의 부활을 전하니 더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은 이미 늦은 시간이라 다음날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재판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을 재판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였던 바로 그 무리들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전에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었습니다.(마21:23)
 아마도 사도들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재판을 기억했을 것이고, 자신들도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10절). 시편(118:22-23)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1절).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12절).
 베드로의 이 설명을 들은 산헤드린의 모든 지도자들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인데 성경을 잘 알고 담대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침 받은 앉은뱅이가 함께 증인으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14절).
 종교지도자들은 다만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행하거나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17-18절).
 재미있는 것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 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인데도 아무도 그것을 반론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모든 종교지도자들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기에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거나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위협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온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사도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첫째, 고난이 찾아올 때 사도들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고 행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들은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결정이 고난과 어려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종종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뜻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을 따르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십니까? 아니면 그냥 전체의견이나 권위자의 뜻을 따라갑니까?
 
 저도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부모님께 더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순종할 수 있었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은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왜 내가 예수님을 믿는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교회에 가지 말라는 것은 순종할 수 없다고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나 국가나 직장같이 우리가 순종해야 할 여러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것보다 더 높은 권위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국가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선생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의 상사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이 모든 것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왕이 내린 법령은 모든 사람들이 왕의 금 신상에게 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절하지 않으면 화형을 당하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청년은 절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다니엘서 3:13-18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세 청년은 왕이 내린 법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불에 타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인, 타국에서의 성공, 재산, 가족, 목숨까지도 다 잃어버릴 수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보다 더 존귀하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카자흐스탄에 처음 갔을 때 과거 구소련시절에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가고 고난을 당한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공산당원으로 출세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가거나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순종하여 혀가 잘린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시와 조롱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중국교회의 부흥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고 있었을 때라 궁금해서 <왜 중국교회가 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가 들은 대답은 <중국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들은 소식 중에 하나는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많은 부모들이 아기의 손목에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기독교는 소수 종교이기에 이슬람 사회에서 여러 가지 핍박과 손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비록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불이익을 당해도 신앙 안에서 살기를 소망하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에 고난의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견뎌내며 인내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의해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숫자보다 20세기 한 세기 동안에 신앙 때문에 순교한 숫자가 더 많다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 찾아온다면 그것을 인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두 번째, 고난이 찾아올 때 사도들은 교회에 가서 자신들이 당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23-24절입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찾아온 고난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하지 않게 위협하는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함께 모여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 특별히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종종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의 능력과 위로를 알고 있다면 함께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히 어려움이 있을 때 더 열심히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합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도 그저 종교적인 인사치례 처럼 부탁합니다. 기도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선교지에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과, 또한 한국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살면서 참 많이 눈물 흘리며 불렀던 찬양가운데 하나는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저는 많은 위로를 받고 힘을 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요한일서 5:14-15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약속하십니다.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마태복음 18:19-20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십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만드십시오. 기도의 시간을 정하십시오. 매일 5분씩이라도 하루에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시간에, 저녁에 자기 전에 세 번 기도해 보십시오.
 
 세 번째, 고난이 찾아올 때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29-31절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이 경고받은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8절을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위협을 당하고 있는 문제 앞에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침묵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도를 중단하기만 하면 고난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 내용 중에 한가지는, 위협 속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파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고난을 비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보고 들었고 경험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비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바보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실제적인 물리적인 핍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나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2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도하기를 포기한다면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은 누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우리의 친구들은 누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은 누가 구원할까요?
 
 10-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들은 당신들이 핍박한 예수님께서 바로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소망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아직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너무 편협한 생각이고 다른 종교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구원에 대해 모든 종교가 다르게 가르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치는데, 서로 다른 가르침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따르든지 아니면 성경의 말씀을 거부하든지.
 
 제가 군대 생활 할 때 잠시 철책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북한 군인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지뢰를 많이 뿌려났는데, 종종 사고가 나 우리 군인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표시들이 있는데,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글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화살표로 지뢰가 없는 곳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꼭 그 길로만 가야 하는데 때때로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 병사가 보초를 서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피곤해서 멀리 가는 것이 힘들고, 내무반에 빨리 가고 싶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여 지뢰밭으로 들어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 같으면 강제라도 못 가게 할 것입니다.
 제가 그길로 가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것이 편협한 생각일까요? 너무 그 사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없어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제가 그냥 이해해주고 가게 내버려든다면, 그는 죽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그러운 사람인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삶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당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나가면, 교회에 고난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갑니다. 매를 맞습니다. 돌에 맞아 생명을 잃습니다. 모욕을 당합니다.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당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대한 주님의 뜻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영원한 해결되지 않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십니다. 그분의 뜻은 완전하십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우즈벡의 한 선교사가 추방된 후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갑자기 떠나게 되어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슬펐지만 가장 슬픈 것은 지난 10년 동안 함께 했던 믿음의 지체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묻더군요.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저는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아마도 우리가 이제는 우즈벡을 떠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교사는 자신에게 찾아온 어려움의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한가지 역사 속에서 분명한 것은, 교회는 오히려 고난 때문에 더 견고해지며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어려움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때때로 핍박이나 고난 같은 어려움을 주면서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신앙생활에서 물러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예. 고난은 분명히 우리의 삶과 신앙에 유익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난을 생각할 때 어떻습니까?
 즐겁습니까? 감사합니까? 기쁩니까?
 우리가 정직하다면 고난을 즐거워하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싫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감옥에 가 있는 것은 놀이가 아니지요. 1박2일 체험이 아닙니다. 냄새나고 쥐와 벼룩과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춥고 고된 경험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즐길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 뜻 안에서 받는 어려움이라면 인내합시다.
 욥은 욥기 23:10에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고난을 통해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67,71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교훈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경험하는 어려움은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려움을 통해 주께서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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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강해(10) - 전도자 빌립(행8:26-40)

김기태

2019/07/14

23

298

 사도행전 강해(9) - 흩어지는 교회(행8:1-25)

김기태

2019/07/07

28

297

 사도행전 강해(8) 교회의 첫 순교자(6:8-7:60).

김기태

2019/07/01

34

296

 사도행전 강해(7) - 교회사역의 우선순위(행6:1-7)

김기태

2019/06/23

38

295

 사도행전 강해(6) - 교회의 순결(행4:32-5:11)

김기태

2019/06/17

50

294

 사도행전 강해(5) -교회 핍박의 시작(행4:1-37)

김기태

2019/06/1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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